판교의 임계점, 지금 설계하지 않으면 건물만 남는다 [기획]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 5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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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건물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할 것인가. 이 질문은 사실 더 간단하게 바꿀 수 있다. 판교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시리즈를 시작할 때 전제로 삼은 것이 있었다. 판교가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한 건 기업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혁신이 자라날 수 있는 구조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00개 기업과 100조 원 매출이라는 숫자 뒤에 뿌리가 없었다. 그 뿌리가 이제 막 심어지기 시작했다. KAIST AI 연구원이 착공됐고, 카네기멜런대와 협약이 체결됐다. 하지만 씨앗을 심었다고 나무가 자라는 게 아니다.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시급한 것 : 연결 구조를 지금 설계하라
2028년 KAIST AI 연구원이 문을 열면, 그날부터 학생들이 판교 기업과 연결될 것이라고 기대하면 오산이다. 그 연결은 건물이 완공된 날 자동으로 생기지 않는다. MIT가 켄달스퀘어 바이오텍 허브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건 MIT 교수진이 수십 년에 걸쳐 병원·제약사·투자자와 비공식적으로 쌓아온 관계망 덕분이었다. 스탠퍼드 산업단지가 작동한 건 터만이라는 사람이 교수와 기업 사이를 직접 오가며 연결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판교에는 지금 그 역할을 하는 구조가 없다. 성남시가 나서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KAIST AI 연구원이 완공되기 전인 지금, 성남시와 KAIST, 판교 기업들이 3자 협약을 맺어야 한다. 기업이 실제 연구 과제를 제시하고 KAIST 대학원생이 그 문제를 논문 주제로 삼는 구조, 학생이 학기 중 판교 기업에서 주 2~3일 일하며 학점을 받는 코업(Co-op) 프로그램, KAIST 연구 성과가 스타트업으로 이어질 때 판교 내에서 초기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경로. 이것들은 건물이 완공된 뒤에 만들 수 없다. 지금 설계해야 한다.
제3판교 실패에서 배운 것 : 대학에 돈을 내라고 하지 마라
2025년 제3판교 앵커 대학 유치 공모에 참여한 대학이 한 곳도 없었던 사실을 기억하자. 원인은 1,000억 원대 용지비였다. 이 실패는 명확한 교훈을 남겼다. 대학을 유치하고 싶다면 대학에 부동산 투자자의 역할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KAIST AI 연구원이 가능했던 이유는 성남시가 시유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이 정답이다. 제3판교에 다시 대학을 유치하려 한다면, 부지는 무상 제공이나 장기 저가 임대로 제공해야 한다. 대학이 부담해야 하는 건 땅값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의 질이어야 한다. 이미 협약이 체결된 카네기멜런대 ETC도 마찬가지다. 판교에 캠퍼스를 열기로 결정할 수 있도록 공간과 초기 비용을 성남시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CMU ETC 졸업생 한 명이 판교에서 게임·AI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성공하면, 그 파급력은 어떤 마케팅보다 강력하다.
돈의 흐름도 바꿔야 한다
혁신 생태계에서 대학과 기업의 연결만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자본의 흐름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선순환이 작동하는 건 성공한 창업자의 돈이 다음 세대 창업자에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판교에서 Exit에 성공한 창업자들이 그 돈을 들고 어디로 가는가. 강남의 빌딩을 사는가, 아니면 다음 판교 스타트업에 투자하는가. 이스라엘은 1993년 정부가 1억 달러를 투자해 10개 VC 펀드를 만들었다. 해외 유명 VC와 공동 투자하는 방식이었고, 성공하면 정부 지분을 민간에 매각해 퇴장했다. 시장을 뒤틀지 않으면서도 초기 자본 생태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1인당 VC 투자 세계 1위인 나라가 된 출발점이 이 프로그램이었다. 성남시와 경기도가 공동으로 판교 기술사업화 펀드를 만들 수 있다. KAIST AI 연구원이나 CMU ETC에서 나온 기술이 스타트업이 될 때 초기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전용 펀드다. 규모는 500억에서 1,000억 원 수준이면 시작할 수 있다. 성남시 연간 예산이 3조 원이 넘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숫자가 아니다.
판교의 임계점
지금 판교는 분기점에 서 있다. 보스턴 Route 128은 한때 실리콘밸리의 경쟁자였다. 하지만 폐쇄적 구조와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준비 부족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MIT라는 앵커 덕분에 바이오텍 허브로 다시 살아났다. 판교는 지금 Route 128이 무너지기 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기업들이 모여 있고, 숫자는 좋고,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제 막 대학이라는 앵커를 심기 시작했다. 이 앵커가 판교 생태계와 실질적으로 연결되면, 판교는 다음 단계로 올라갈 수 있다. AI 원천기술이 판교에서 나오고, 그 기술로 창업한 스타트업이 판교에서 자라고, 성공한 창업자가 다음 세대에 재투자하는 선순환. 그것이 완성됐을 때 비로소 판교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층위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연결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2028년 판교에는 KAIST 간판을 단 번듯한 건물 하나만 남는다. 스탠퍼드가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데 47년이 걸렸다. 판교가 그 시간을 단축하려면, 지금 당장 설계를 시작해야 한다. 건물보다 생태계가 먼저다.
'판교는 왜 실리콘밸리가 되지 못했나' 시리즈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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